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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사연 공모 : 해 저문 오후, 그 날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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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르 댓글 0건 조회 175회 작성일 19-11-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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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조카를 만났습니다.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지라 친구 같은 이였지요. 이곳과는 계절이 반대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란 걸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기억하는 어렸을 적 모습을 다시 꺼내어보며 이야기를 한창 나누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 한 마디의 물음은 불순한 의도 없이, 순수하게 저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적당히 대충, 그런 것 같아, 하고 대답해도 됐으련만 이상하게 그의 물음에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안 행복해. 일을 하고 있지만 가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피곤해서 별로 하고 싶지 않고... 그는 두서 없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깊게 끄덕여주었습니다. 그러곤, 그럼 예전에 행복했었던 경험을 기억해보라고 말해주었어요.


그가 돌아가고 나서 한동안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을 때면, 그 말을 되새겨보곤 했습니다. 행복했었던 기억, 기뻤던 경험. 문득 대학교 1학년 때가 생각났습니다. 어쩌다 학과 OT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해 가을밤에 열리는 학과 축제 장기자랑에 나가보라고 추천을 한 것입니다. 기타든 노래든 좋아하긴 하지만 잘 치고 잘 부르는 편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터라 부끄러웠습니다. 혹시나 연주를 하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노래를 부르다 음이라도 이탈하면 어떡하지, 도망쳐야 하나, 아프다고 하고 무대에 서지 말까. 별별 걱정이 머릿속에 맴돌았는데, 갑자기 어떤 오기가 생기는 겁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올라가 보기나 할까 싶었던 거예요. 한창 유행하던 티브이 오디션 프로그램도 아니고, 그냥 학과 사람들만 모여서 소소하게 즐기는 축제일 뿐인데 무슨 걱정이냐고요. 실수하면 슬쩍 웃고 내려오면 되지! 불면의 밤이 이어지던 끝에, 무대에 올라보기로 했습니다. 장기자랑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시월의 어느 밤, 무대가 열렸습니다. 학과 내에서 나름 내로라하는 이들이 노래나 유머 등을 선보였습니다. 어느새 제 차례. 서느런 가을밤의 공기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목소리도 염소 같아졌지만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저는 1학년 누구누구고요, 노래 부르겠습니다... 저마다 주전부리를 손에 든 채 분위기에 취해가고 있었습니다.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떠보았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의 눈빛은 그저 즐거웠지요. 다들 웃고 떠들며 제 노래를 기다렸습니다. 비로소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노래 도중에 실수가 있긴 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후련하게 준비했던 노래를 마쳤고,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날 이후 학과방에 가지러 갈 것이 있어 들르니 당시 학과회장이었던 선배가 제게 말했습니다. 너 이번에 장기자랑에서 2등했어! 저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2등 상품은 문화상품권 1만원 권 한 장. 근데 미안한데,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 어디 써버렸어, 미안! 그러면서 회장 선배는 지갑을 열어 본인 돈 만 원을 현금으로 주더라고요. 대신 이거라도 주면 안될까? 아무렴, 안될 것도 없어서 저는 방글방글 웃으며 만 원을 받아들었습니다. 수업이 일찍 끝나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유난히 달콤하고 따스한 냄새가 역사를 아늑하게 감싸는 겁니다. 다름 아닌, 델리만쥬 냄새. 왜, 호두과자처럼 묽은 밀가루 반죽을 무쇠틀에 짜넣고 슈크림을 안에 넣어 굽는 달콤한 과자 있잖습니까. 갑자기 델리만쥬가 너무 먹고 싶어지는 겁니다. 내가 돈이 없을 텐데... 하다가 퍼뜩 떠오른 건 회장 선배에게서 받은 제 상금이었습니다. 무려 다섯 봉지나 사먹을 수 있는 돈!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델리만쥬 한 봉지를 사서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그래도 지하철 안에서 먹기는 눈치가 좀 보여서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1호선 지하철은 교대역에서 동래로 향하는 중이었고, 철컹철컹 흔들리며 지상으로 떠오르는 지하철 창으로 진한 노을빛이 녹진하게 스며들었습니다. 안되겠다! 저는 주변을 둘러본 후 델리만쥬 한 알을 꺼내 먹었습니다. 아직 따끈한 델리만쥬의 달콤함, 머리 위로 한가득 쏟아지는 노을빛. 그 때 중얼거렸던 것 같습니다. 진짜 행복하다. 진짜 행복하다... 대단한 노래도 아니었지만 부르는 순간에 즐거웠고, 그 노래 덕분에 큰 돈은 아니지만 상금도 탔고. 내 힘으로 번 돈이라는 사실과 그 밤 즐거웠던 기분이 섞여서 마음이 자꾸만 부풀더라고요.


썩 크게 웃을 일이 없는 요즘, 그 날 밤의 노래와 어느 오후의 노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물음을 되짚어봅니다. 요즘은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 주변에서 제게, 혹은 제가 주변에 행복을 물을 기회가 없다보니 그 물음은 생경하지만 동시에 꽤 중요한 전환점이 되더라고요. 내가 진짜로 좋아한 일이 무엇인지, 일상의 타성에 길들여져 무언가를 좋아했던 마음이 닳고 닳아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적당히 지내는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지내다보면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나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언제 또 오니? 조카와 이야기를 하던 날 물었더니 적어도 일 년은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자리를 잡으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치만 나 되게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처음부터 배우는 게 너무 힘든데, 힘든만큼 행복해. 당당하게 웃어보였던 조카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한 해가 지나고 조카가 다시 저를 찾아온다면 말하고 싶어요. 행복을 물어주어 고맙다고요. 그 전까지 행복에 관해서 다소 무감각해져 있었는데 네 덕분에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그래서 뭘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다시 기타를 떠듬떠듬 만져보기 시작했다고도 말해줄 참입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지도. 일 년 하고도 시간이 더 필요해질지 모르겠지만, 조카와의 해후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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