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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원님희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6-01-29 05:2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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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기자]
▲ 프란체스카 도너
ⓒ 위키미디어 공용
자유당 정권의 두 축은 이승만-이기붕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이었다. 잘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두 축은 프란체스카-박마 바다이야기오리지널 리아다. 이 정권의 중대 결정은 이승만-이기붕의 배우자들 사이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한국을 지배한 여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V0이었다는 점은 캐나다 및 미국 언론사들에 콘텐츠를 배급하는 북미신문연맹(NANA)의 기사인 '12년 폭정을 지배한 두 여인'에서도 확인된다. 1960년 5월 19일자 <경향 게임몰릴게임 신문> 2면에 '한국을 지배한 두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기사는 "(프란체스카가) 노 대통령의 아내로서 자기가 쥐고 있던 권세에 단단히 맛을 들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평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 관리로 임명되는 사람은 그녀가 그들에게 개인적인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임명되는 수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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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가 단순한 호의만으로 공직을 주선해준 것은 아니다. 이 기사는 그의 인사 개입이 매관매직의 성격도 띠었음을 알려준다.
"최근에 해임된 주일대표부의 한국대사도 그녀가 두둔□던 인물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카에게 값비싼 금고로부터, 사철 끊임 게임릴사이트 없이 나는 신선한 과물(果物)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물을 갖다 바쳐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1949년 1월에 설치된 주일한국대표부의 기관장은 수석대사로 불리다가 1950년 6월에 수석공사로 개칭됐다. 그래서 "최근에 해임된 주일대표부의 한국대사"인 유태하는 대사가 아니라 공사 무료릴게임 였다. 그렇지만 관행적으로 대사라고 불렸다.
1960년 5월 11일자 <경향신문> 1면 좌중단은 "수일 전에 주일한국대표부 대사직을 사임한 유태하 씨는 남한으로 가는 여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행위로 2천만 불 이상의 재산을 만들었다고 10일 재일한국인의 한 구루프가 주장하였다"고 전했다. 재일교포 그룹이 유태하의 불법적인 비자 장사를 거론했을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1년 뒤에 발행된 1961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 '정계 스냅' 코너는 "유태하란 사람은 지금 일본에 있기에 망정이지 여기 있었으면 형무소에 갈 사람 아냐?"라며 그를 "프란체스카의 심복"으로 지칭했다. 이승만의 심복이 아닌 프란체스카의 심복으로 불렸다. 프란체스카가 자기 사람을 공직에 앉히는 일이 세상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렇게 지칭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도 어쩌지 못한 "마담의 명령"
프란체스카가 인사 문제에 개입한 것은 정권 초기부터다. 주오대학과 와세다대학에 이어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48년 정부수립 당시에 대통령비서관이 되고 그 뒤 4선 의원을 역임한 박용만(1924~1996)의 <경무대 비화>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용만은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의 중앙청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위 책에 따르면, 그는 1948년 12월에 비서실을 찾아와 자신을 대통령의 친척 동생으로 소개하는 연로자를 대통령 집무실에 들여보냈다. 이는 대통령 친척을 면회시키지 말라는 프란체스카의 지시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친척 동생의 면담은 예정 시간 10분을 훌쩍 넘겨 2시간 이상 진행됐다.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리며 옛이야기에 빠졌다.
그날 저녁 박용만은 경무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격노한 프란체스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도대체 비서가 그따위 사람을 면회시키는 법이 어디 있소?"라고 고함쳤다. "프 여사는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펄펄 뛰었다"고 박용만은 회고했다. 하지만 박용만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척 동생을 어떻게 그냥 돌려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기붕 비서실장이 박용만을 호출했다. 오늘부터 중앙청이 아닌 경무대 비서실로 가라는 통고가 이기붕의 입에서 나왔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이기붕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마담의 명령"이라고 답했다.
경무대로 출근한 지 얼마 뒤, 박용만은 장택상 외무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장택상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오늘부터 자네는 내 사람이라며 좋아했다. '프 여사'가 오늘 아침에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 자네를 내 옆에 두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인사명령에 승복할 수 없었던 박용만은 이승만을 찾아가 항의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왜 박 비서를 외무부로 보내느냐는 게 이승만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황을 확인한 뒤에도 어쩌지 못했다. 자기 비서관이 자신도 모르게 외무부 직원이 돼 있는데도 그는 인사조치를 취소시키지 못했다.
이승만은 "자네 결혼했나?"라고 물었다. "아직 미혼입니다"라는 답을 들은 이승만은 '옛 비서관'의 등을 쓰다듬으며 "자네도 결혼하면 알게 될 터이지", "저 사람 하는 것을 못하게 하면 내가 견디어 날 수가 없어"라며 도리어 사정을 했다.
이 장면은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묵인하에 인사문제를 쥐락펴락하는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부수립 4개월 뒤의 일이다. 프란체스카가 정권 초기부터 인사문제에 개입했던 것이다.
견제 못한 정권 리스크
▲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부부. 1951.3.23.
ⓒ 연합뉴스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 보고에도 개입했다. 남편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게 그의 명분이었다. 위의 북미신문연맹 기사는 "그녀는 측근자들 및 비서들에게 '대통령에게 하는 보고에는 정계의 동향 중에서 불쾌한 진실이나 암울한 사실 등을 넣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연로한 대통령을 실제로 일종의 침묵의 벽 속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고 말한다.
박용만의 회고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경무대 비화>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남편이 현관을 나설 때의 표정을 상세히 살폈다가, 관저로 되돌아오면 또다시 표정을 뚫어지게 검사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세세히 캐물었다. 박용만은 이렇게 말한다.
"프 여사는 몇 십 년을 두고 이 박사의 표정을 살펴왔기 때문에 그녀의 관록도 대단해서 이 박사의 표정을 살피는 데는 귀신 같았다. 그래서 나는 프 여사를 관상장이 할머니라고 별명을 붙였다."
그런 프란체스카의 존재는 국가적으로 해악이 됐다. 박용만은 "프 여사의 이와 같은 관상장이 놀음에 우리나라 국정이 병드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었다"고 평한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표정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의 감정을 남편의 측근들 앞에서 그대로 표시했다. 남편의 표정이 좋아 보이면 "어린애들같이 수선을 떨고 야단을" 부렸다. 표정이 나빠 보이면 그의 기분도 나빠졌다. 그래서 고위 관료들은 대통령 앞에서 제대로 보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박용만의 회고다.
"어떤 사람이 국사를 위해 올바른 일이나 말을 했다가 대통령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다면, 프 여사는 대통령의 기색을 통해 이를 캐묻고 알아내서는 그렇게 만든 사람을 이때부터 경원하고 미워해서 끝에 가서는 그 사람을 매장토록 하고 말았다."
이처럼 이승만뿐 아니라 프란체스카에게도 문제가 많았다. 자유당 정권의 리스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승만뿐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는 그 부인 때문에도 증폭됐다. 자유당 정권의 폭정으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견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보이는 이승만에 대한 견제도 그러했으니, 잘 보이지 않는 'V0'에 대한 견제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헌법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견제 장치(파면·해임 등)가 나열돼 있다. 그러나 잠재적 권력자인 그들의 배우자에 대한 견제 장치는 전무하다. 그런 틈을 비집고, 1948~1960년 기간에는 프란체스카 도너가 VO으로 떠올랐다. 이승만의 폭정은 곧 프란체스카 도너의 폭정이었다.
▲ 프란체스카 도너
ⓒ 위키미디어 공용
자유당 정권의 두 축은 이승만-이기붕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이었다. 잘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두 축은 프란체스카-박마 바다이야기오리지널 리아다. 이 정권의 중대 결정은 이승만-이기붕의 배우자들 사이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한국을 지배한 여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V0이었다는 점은 캐나다 및 미국 언론사들에 콘텐츠를 배급하는 북미신문연맹(NANA)의 기사인 '12년 폭정을 지배한 두 여인'에서도 확인된다. 1960년 5월 19일자 <경향 게임몰릴게임 신문> 2면에 '한국을 지배한 두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기사는 "(프란체스카가) 노 대통령의 아내로서 자기가 쥐고 있던 권세에 단단히 맛을 들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평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 관리로 임명되는 사람은 그녀가 그들에게 개인적인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임명되는 수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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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해임된 주일대표부의 한국대사도 그녀가 두둔□던 인물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카에게 값비싼 금고로부터, 사철 끊임 게임릴사이트 없이 나는 신선한 과물(果物)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물을 갖다 바쳐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1949년 1월에 설치된 주일한국대표부의 기관장은 수석대사로 불리다가 1950년 6월에 수석공사로 개칭됐다. 그래서 "최근에 해임된 주일대표부의 한국대사"인 유태하는 대사가 아니라 공사 무료릴게임 였다. 그렇지만 관행적으로 대사라고 불렸다.
1960년 5월 11일자 <경향신문> 1면 좌중단은 "수일 전에 주일한국대표부 대사직을 사임한 유태하 씨는 남한으로 가는 여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행위로 2천만 불 이상의 재산을 만들었다고 10일 재일한국인의 한 구루프가 주장하였다"고 전했다. 재일교포 그룹이 유태하의 불법적인 비자 장사를 거론했을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1년 뒤에 발행된 1961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 '정계 스냅' 코너는 "유태하란 사람은 지금 일본에 있기에 망정이지 여기 있었으면 형무소에 갈 사람 아냐?"라며 그를 "프란체스카의 심복"으로 지칭했다. 이승만의 심복이 아닌 프란체스카의 심복으로 불렸다. 프란체스카가 자기 사람을 공직에 앉히는 일이 세상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렇게 지칭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도 어쩌지 못한 "마담의 명령"
프란체스카가 인사 문제에 개입한 것은 정권 초기부터다. 주오대학과 와세다대학에 이어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48년 정부수립 당시에 대통령비서관이 되고 그 뒤 4선 의원을 역임한 박용만(1924~1996)의 <경무대 비화>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용만은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의 중앙청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위 책에 따르면, 그는 1948년 12월에 비서실을 찾아와 자신을 대통령의 친척 동생으로 소개하는 연로자를 대통령 집무실에 들여보냈다. 이는 대통령 친척을 면회시키지 말라는 프란체스카의 지시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친척 동생의 면담은 예정 시간 10분을 훌쩍 넘겨 2시간 이상 진행됐다.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리며 옛이야기에 빠졌다.
그날 저녁 박용만은 경무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격노한 프란체스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도대체 비서가 그따위 사람을 면회시키는 법이 어디 있소?"라고 고함쳤다. "프 여사는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펄펄 뛰었다"고 박용만은 회고했다. 하지만 박용만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척 동생을 어떻게 그냥 돌려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기붕 비서실장이 박용만을 호출했다. 오늘부터 중앙청이 아닌 경무대 비서실로 가라는 통고가 이기붕의 입에서 나왔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이기붕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마담의 명령"이라고 답했다.
경무대로 출근한 지 얼마 뒤, 박용만은 장택상 외무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장택상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오늘부터 자네는 내 사람이라며 좋아했다. '프 여사'가 오늘 아침에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 자네를 내 옆에 두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인사명령에 승복할 수 없었던 박용만은 이승만을 찾아가 항의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왜 박 비서를 외무부로 보내느냐는 게 이승만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황을 확인한 뒤에도 어쩌지 못했다. 자기 비서관이 자신도 모르게 외무부 직원이 돼 있는데도 그는 인사조치를 취소시키지 못했다.
이승만은 "자네 결혼했나?"라고 물었다. "아직 미혼입니다"라는 답을 들은 이승만은 '옛 비서관'의 등을 쓰다듬으며 "자네도 결혼하면 알게 될 터이지", "저 사람 하는 것을 못하게 하면 내가 견디어 날 수가 없어"라며 도리어 사정을 했다.
이 장면은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묵인하에 인사문제를 쥐락펴락하는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부수립 4개월 뒤의 일이다. 프란체스카가 정권 초기부터 인사문제에 개입했던 것이다.
견제 못한 정권 리스크
▲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부부. 1951.3.23.
ⓒ 연합뉴스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 보고에도 개입했다. 남편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게 그의 명분이었다. 위의 북미신문연맹 기사는 "그녀는 측근자들 및 비서들에게 '대통령에게 하는 보고에는 정계의 동향 중에서 불쾌한 진실이나 암울한 사실 등을 넣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연로한 대통령을 실제로 일종의 침묵의 벽 속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고 말한다.
박용만의 회고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경무대 비화>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남편이 현관을 나설 때의 표정을 상세히 살폈다가, 관저로 되돌아오면 또다시 표정을 뚫어지게 검사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세세히 캐물었다. 박용만은 이렇게 말한다.
"프 여사는 몇 십 년을 두고 이 박사의 표정을 살펴왔기 때문에 그녀의 관록도 대단해서 이 박사의 표정을 살피는 데는 귀신 같았다. 그래서 나는 프 여사를 관상장이 할머니라고 별명을 붙였다."
그런 프란체스카의 존재는 국가적으로 해악이 됐다. 박용만은 "프 여사의 이와 같은 관상장이 놀음에 우리나라 국정이 병드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었다"고 평한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표정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의 감정을 남편의 측근들 앞에서 그대로 표시했다. 남편의 표정이 좋아 보이면 "어린애들같이 수선을 떨고 야단을" 부렸다. 표정이 나빠 보이면 그의 기분도 나빠졌다. 그래서 고위 관료들은 대통령 앞에서 제대로 보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박용만의 회고다.
"어떤 사람이 국사를 위해 올바른 일이나 말을 했다가 대통령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다면, 프 여사는 대통령의 기색을 통해 이를 캐묻고 알아내서는 그렇게 만든 사람을 이때부터 경원하고 미워해서 끝에 가서는 그 사람을 매장토록 하고 말았다."
이처럼 이승만뿐 아니라 프란체스카에게도 문제가 많았다. 자유당 정권의 리스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승만뿐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는 그 부인 때문에도 증폭됐다. 자유당 정권의 폭정으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견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보이는 이승만에 대한 견제도 그러했으니, 잘 보이지 않는 'V0'에 대한 견제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헌법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견제 장치(파면·해임 등)가 나열돼 있다. 그러나 잠재적 권력자인 그들의 배우자에 대한 견제 장치는 전무하다. 그런 틈을 비집고, 1948~1960년 기간에는 프란체스카 도너가 VO으로 떠올랐다. 이승만의 폭정은 곧 프란체스카 도너의 폭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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