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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5억원.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정부의 밸류업 프로젝트가 진행됐던 지난해 29개 상장사가 공시한 횡령 및 배임 액수다.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범죄에 소액주주는 보호받지 못하고 소외돼 있다. 경영진이 횡령과 배임을 저질러 주식 거래가 정지되고 상장폐지 되더라도 소액주주는 사전에 이를 감시할 수 없고, 책임을 물릴 수도 없다. 피해를 떠안은 채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상장기업들의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기업가치 제고를 연일 외치고 있는 국내 주식시장에서 배제된 소액주주의 눈물을 중점적으로 조명해본다.



지모씨(50·남)를 처음 본 건 지난해 8월, 무더운 날이었다. 배산임수 수원 영통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만난 지씨의 모습은 단정한 복장과 오랜 사회생활로 장착한 엷은 미소, 영락없는 직장인이었다.

"아이고 제가 커피를 샀어야 했는데."
미리 준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자 지씨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자리에 앉아 서로의 나이, 사는 곳, 직장 생활 등을 묻 미즈사랑 무직자 고 답하다가 잠깐의 공백이 생겼다. 지씨는 커피잔에서 흐르는 물을 닦아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1년 전이었다면, 우느라고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지모씨(45·남)는 2023년 9월 경기 화성시에 있는 건달산에서 자살했다. 그는 4억원 종합원가계산 가량 투자한 코스피 상장사 이아이디가 거래정지되자 심적 고통을 겪었다. 생전 등산하고 있는 지씨의 모습. /제공=지씨 유가족



지씨는 2023년 9월5일을 떠올렸다. 당시 지씨는 수원에 위치한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다가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지OO씨 맞으신가요?" 국민은행 수수료 면제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끊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두 번째로 받은 전화에서는 저 너머에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씨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경찰이었다. 경찰은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전했다. 지씨의 남동생 A씨(45·남)가 경기 화성시 츠키사 에 있는 건달산에서 자살한 것이다.
지씨의 동생은 경남 창원에 위치한 자동차 회사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주말마다 수원에 올라와 형과 놀러 갈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동생은 수원에 온 김에 건달산으로 자주 캠핑을 하러 갔다. "그렇게 좋아하던 산이 동생의 마지막 장소가 될 줄이야." 지씨는 한숨만 내쉬었다.

지씨의 기억 속 동생은 언제나 밝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2023년 5월, 한 사건을 겪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뻔뻔한 사람도 있지만, 착한 사람도 있잖아요. 그리고 착한 사람은 도저히 못 버틸 일이 있어요. 제 동생이 그 일을 당했습니다."언제나 밝았던 동생, 주식 거래정지에 어둠 속으로

이화그룹 계열사 이화전기·이아이디·이트론은 2023년 5월10일 한국거래소로부터 거래정지를 당했다. 전·현직 임원 등이 횡령·배임 혐의를 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거래정지되고 다음날, 이화전기는 횡령액이 약 8억3000만원이라고 공시했다.
한국거래소는 이화전기의 공시 이후, 같은해 5월12일 이화그룹 계열사에 대한 거래정지를 풀었다. 하지만 한국거래소는 같은날 오후 2시22분께 다시 거래를 정지시켰다. 알고 보니 김영준 전 이화그룹 회장 등 임원진의 횡령액은 100억원이 넘었다. 2거래일 동안 이화그룹에 투자한 소액주주들의 상황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 주주 중 한 명이 지씨의 동생이었다. 동생은 2023년 초 이아이디와 이화전기에 총 4억원을 투자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힘들게 번 월급과 주식 투자로 모은 돈이었다. 동생은 빠르게 오르는 주가를 보면서 올라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했다. 이화그룹 계열사 종목이 2차전지 관련주로 묶이면서 2023년 1월2일 기준 834원이던 이아이디의 종가가 같은해 4월20일 최고가 3860원까지 올랐다. 3개월 만에 주가가 4배 이상 뛴 셈이다.
지씨의 동생은 홀린 듯 주변에 이화그룹 관련주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형인 지씨에게도 주식을 추천했다. 지씨는 동생의 계속되는 추천에 못 이겨 이아이디 주식 5000만원치를 매수했다.
"미안해 형."
한국거래소가 2023년 9월1일 이화그룹 계열사의 상장폐지를 결정하자 동생은 지씨에게 사과를 건넸다. 지씨는 괜찮다고 다독였다. 하지만 동생은 거래정지 이후 좀처럼 집에서 나가질 않았다. 지씨는 동생이 워낙 밝았기에 툭툭 털어내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알지 못했다.

"5000만원은 필요 없고 생각도 안 합니다. 지금도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요. 주식투자 하지 말라고 더 세게 얘기할 걸…."수렁에 빠지는 현실…소액주주만 발 '동동'




김현 이화그룹 주주연대 대표가 10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서 열린 상장폐지 간소화 정책에 반대하는 소액 주주들 집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상장폐지 심사 기준 명확화, 횡령·배임에 따른 차등적 상장폐지 절차 도입, 기업 및 유관기관 투명성 강화, 주주 권리 보호 위한 사회적 공론화 등을 촉구했다. 2025.02.10 윤동주 기자



거래정지된 이아이디는 어떻게 됐을까. 어느 기업들처럼 한국거래소의 상장폐지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국거래소는 이아이디에 대한 상장폐지 결정을 미뤘다.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준 셈이다.

하지만 이아이디는 소액주주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보를 이어갔다. 이아이디는 지난해 3월21일 감사의견 거절을 공시했다.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 업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기업의 경영을 이어가기 어려운 중대한 사항이 있다고 판단할 때 주어진다. 이에 한국거래소는 상장폐지를 결정하지만 이아이디가 또다시 이의를 신청하면서 판단 시점이 밀린다. 지난해 8월28일에는 공시를 번복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화그룹 계열사의 거래정지가 길어지는 만큼 소액주주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거래정지된 종목의 소액주주들은 다급한 마음에 지난 2월10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 집결했다. 이들은 자신의 자산이 거래정지로 묶여있는 현실에 분노를 호소했다. 김현 이화그룹소액주주연대 대표는 집회에서 "부도덕한 이사와 대주주의 횡령 및 배임, 주식시장 관리 및 감독 시스템의 부재로 내 소중한 자산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게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이아이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거래정지된 104개 기업의 평균 거래정지 일수는 약 473일이다. 거래정지 일수가 1000일이 넘어가는 기업은 15개에 달한다.


이화그룹 계열사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달 14일 한국거래소는 이화전기·이아이디·이트론에 대한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1월에 3개사는 한국거래소에 개선계획 이행내역서를 제출하고 심의를 요청했지만 결국 퇴출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다만 곧바로 상장폐지가 되지는 않았다. 이화전기·이아이디·이트론은 한국거래소 결정에 상장폐지결정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만약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화그룹 계열사 주식은 정리매매 등 상장폐지 수순에 들어가게 된다. 이화전기·이아이디·이트론은 지난달 17일 각사의 홈페이지를 통해 "당사를 믿고 기다려준 주주 및 임직원에게 송구하다"며 "상장폐지 결정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명확한 해명을 한국거래소에 요구한다"고 밝혔다.동생 이어 어머니까지…자본시장에 무너진 한 가정




소액 주주 피해자 지모 씨(50·남)가 10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서 열린 상장폐지 간소화 정책에 반대하는 소액 주주들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5.02.10 윤동주 기자



지난달 서울 중구에서 다시 만난 지씨는 안 좋은 소식을 하나 더 알렸다. 그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것. 딸처럼 살가웠던 동생이 자살한 후 어머니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병원을 자주 드나들던 어머니는 결국 지난해 8월13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8월13일은 동생의 생일이기도 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지씨는 고개를 숙였다.

현재 지씨의 집은 적막만 돈다. 아버지는 1주일에 4번 이상 술을 마시면서 지낸다. 이번 설 명절, 아버지는 방에 틀어박혀서 입맛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원래는 고봉밥을 먹든 아버지였다. 지씨는 동생의 자살 이후 먹기 시작한 우울증 약을 점점 술로 대체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였다. 동생의 죽음을 잊고자 시작한 운동도 점차 안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자본시장에 한 가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연이어 가족을 보낸 지씨는 이화그룹에 대해 체념하면서도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굳어진 얼굴에서 입술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국 자본시장이 제 동생을 죽였습니다. 칼로 찔러야만 살인인가요?"'소액주주의 눈물' 글 싣는 순서▶"한국 자본시장이 내 동생을 죽였다"

①임원 횡령으로 거래정지...자본시장에 무너진 한 가정 이야기
3년간 1조원 넘는 상장사 횡령 범죄 발생…작년만 4025억원
②거래정지·상장폐지 이어지는데...횡령·배임 처벌 '솜방망이'
5억 이상 횡령 78건 중 가중처벌은 7건뿐…주주들 엄벌 탄원에도 '솜방망이' 처벌
③특경법상 횡령 1심 판결 전수조사…고액 횡령 범죄 단죄 어려워
소액주주 배제된 주주총회…'일방통행'에 시름
④주식회사의 '꽃' 주주총회 현장서 외면받은 주주들 목소리
횡령죄 처벌 강화 제자리걸음..."정보 비대칭 문제라도 해결 시급"
⑤소액주주·전문가들이 말하는 소액주주 보호받는 법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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